블로그, 2000년대 초반부터 뭔가를 계속 끄적거리며 내 생각과 일상을 표현했던 가장 훌륭한 도구이자 나의 개인사를 아직 일기처럼 보관하고 있는 나만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간단하게 일상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긴 글을 적어야 할 것 같은 블로그는 그야말로 찬밥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그냥 이렇게 방치되어갔다. 그래서 가끔 내가 쓴 글들을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며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내 생각도 세월과 함께 수없이 많은 가지를 치며 다른 형태로 자라온 거겠지. 그리고 어떤 가지들은 이미 잘려져 나가고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겠지. 블로그에 뭔가를 계속 끄적이며 생각을 정리할 때에는 지금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다양했었다는 생각을 한다. 뭔가를 정리하고 표현하는 습관이 나의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줬던 것 같기도 하고. 


뇌는 계속 진화하고 적응해간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제 난 아이폰에 너무 많은 걸 의존하게 되었고, 직접 기억하려는 뇌의 기능은 점점 퇴화하는 느낌이 든다. 나만의 철학과 생각으로 발전시켜가던 나의 정체성은 그냥 모든 사람에게 무난히 끼워 맞춰지는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예전의 글들을 읽다가 보니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딘가 많이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갑자기 좀 불편했다. 그때보다 뭔가 더 좋아진 것만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삶의 질, 환경, 그 외 많은 것들이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어디에선가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냥 내 생활 수준을 계속 맞추고 높이는 기술만 늘어간 게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봤다. 오늘 난 내 블로그로 시간 여행을 잠시 다녀왔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과거의 내 모습들을 만나고 왔다. 뭐가 바로 바뀌는 건 없겠지만, 처음 내가 익숙한 세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났던 때와 같은, 약간은 불편하지만 그러면서도 신선한 청량감, 이 자극을 일단 기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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