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30분쯤 되면 샌프란시스코 본사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 금요일 저녁약속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와서 기획 문서를 마무리하고 새벽 2시30분에 메일을 보냈다. 새벽도 깊어지는 시간에 집에 들어왔는데 유난히 큰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2
Karen이라는 친구가 있다. Facebook에서 만난 친군데 Facebook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안되서 알게 된 친구라 나름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최근에 들어서야 이 친구와는 Karen의 표현에 의하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시작했다. 요즘은 Facebook Message를 통해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 나이는 무척 어린 친구지만 최근에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정말 생각이 많고 어른스러운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미국에서 20대 아이들이 실제로 쓰는 영어 표현들을 공부할 수 있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기도 한다.

#3
토요일 해가 뜨기 전, 새벽에 메일을 보내놓고 집에 들어와서 그동안 회사를 떠나서는 나름 오프라인 생활에 충실했다만, 잠도 안 오고 해서 여기저기 기사들과 개인 메일들을 체킹했다. 그리고 새벽 3시 반쯤 되었을까. 자기 전에 Karen에게 문득 생각난 화제를 메시지로 보내고 브라우저를 끌려고 하는 찰나 Facebook에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숫자가 떴다. 우린 '이기심'과 '관계'에 대해서 메시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4
맙소사, 그녀는 정말 나한테 큰누나가 있다면 해줄 법한 주옥같은 얘기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문화적 차이에서 올 수 있는 새로운 시각에 따른 생각들이 나름 신선하면서도 어떤 대목에선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이날 대화의 마지막 즈음에 나름 정리해서 내린 결론은 이거다. "나 자신을 챙기지 못하고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남을 챙기고 배려하는 행동에 더 집중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맞는 말이지.. 그러나 그 적당한 경계는 어느 정도에 있을까? 일단 부분 수용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의지를 조합해 보도록 한다.

#5
비는 거세게 내렸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싶기도 했고, 영화제 주최측에서 일하는 동생의 프리미엄을 안고 온라인 매진된 표를 구해줬는데, 그 걸 생각해서라도 망설임을 접고 부천으로 가야 했다. '오직 사랑으로'의 히로키 류이치 감독은 무대 인사에서 전세계에서 제일 처음 개봉하는 자리라고 소개를 했다. 어찌 보면 참 웃기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어제 새벽에 나눴던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오직 사랑으로'의 주인공 유리는 Karen의 표현을 빌리자면 "just plain stupid" 라고 표현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하면서 실실거렸다. 단지 영화 속 이야기들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유리의 '희생'이 '사랑'을 떠나서 마치 '몹쓸 배려'병에 걸려 있던 어느 순간의 내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에 살짝 씁쓸하기도 했다.

#6
개인적으로 '오직 사랑으로' 이 영화 추천하지는 않는다. 판타스틱 영화제를 위한 영화이겠지만 그다지 모든 게 공감되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좀 별로였다.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들은 좀 많아졌지만.

#7
요즘 따라 영화, 책, 대화를 통해 뭔가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토론하기도 하고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좋아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전보다)오프라인을 지향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탐닉하려 하는 모습들이 '발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보다 더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를 가두게 하는 건 아닐지 궁금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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